무속이야기
글쓴이 |
나무도령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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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재수야 2024 무속이야기 01 무속의 정의 |
무당의 성격 한계에 따라 무속의 성격이 결정된다. 무당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① 신(神)의 초월적인 힘을 체득하는 신병(神病)의 체험을 거쳐 신권화(神權化)한 사람이어야 한다. 평범하던 한 인간의 신병을 통하여 신을 체험하고 신의 영력을 얻어서 신과 교유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신병을 체험한 강신무(降神巫)는 신병을 신의 소명에 의한 종교현상으로 의식한다. ② 무당은 신병을 통하여 획득한 영통력을 가지고 신과 만나는 종교적 제의인 굿을 주관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굿은 무당들의 정통적인 종교적 표현이며 행위적 현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 이유는 신병을 체험하여 영통력을 획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제의를 독경식(讀經式)이나 불교의식에 의존한다면 무당 본래의 제의인 굿과는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③ 무당은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서 민간층의 지지를 받고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로 인정되기까지는 민간층의 종교적 지지에 의한 사회적 공인이 전제되며, 무당이 비범한 신권자로서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때만 가능하다. ④ 무당의 신앙대상 신은 신병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산신·천신·칠성신·용신 등의 자연신, 또는 장군신·왕신 등이고, 무당이 소망을 비는 신앙의식인 굿은 이들 신을 대상으로 한다. 무당을 이렇게 규정지을 때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성격차이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무당의 갈래를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따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북부지역에는 신이 내린 강신무가, 남부지역에는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세습무(世襲巫)가 분포되어 있다. 세습무는 강신무로부터 분화되어 사회적으로 정착, 제도화하여 영력이 도태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무당을 정리하면, 일차적으로 중부와 북부의 전통적 강신무인 무당 박수류와 남부의 세습무인 호남의 단골, 영남의 무당, 제주도의 심방이 있다. 이차적 방계무로서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선무당류와, 호남·영남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명두·동자 등이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으로 체계화된 종교현상이다. 국내 어느 지역에서나 행하여지는 무속의 기본제의로는 성주굿·삼신굿·지신굿·조왕굿 등 민가의 가신에게 기원하는 제의와, 서낭굿·당산굿 등 마을의 수호신에게 기원하는 제의가 있다. 특히, 굿의 제의순서는 민가의 가신으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거쳐 우주의 천신으로 이어지며, 일반 민간신앙을 집약, 체계화시키면서 무속의 굿은 진행된다. 따라서, 무속은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집약된 것으로 한민족의 정신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생활을 통하여 생리화한 산 종교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인 무속을 한국의 종교사적 입장에서 보면,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한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조직적 형태의 종교현상은 무속이라고 하는 귀결점에 이른다. 무속에 관한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은 신라 제2대 남해왕 때의 것으로 1세기 초가 되고, 최초로 들어온 외래종교로는 4세기 후반의 불교로 알려지고 있다. 즉, 무속에 관한 기록보다 불교가 들어온 것이 약 4세기 후의 일이다. 그리고 무(巫)가 일반 자연종교 현상 속에서 전문화한 신직(神職)의 종교적 지도자로 자리를 굳히기까지는 오랜 역사를 흘러 왔을 것이며, 또 무를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등 미개원시민족의 샤머니즘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 무속의 역사적 배경은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무속은 이렇게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아득한 상고대로부터 한민족의 종교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또 외래종교가 들어온 뒤로도 민간신앙으로서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으로 전승되어 왔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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